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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자기만족적 양육, 비혼출산의 이면

 사유리의 삶을 응원하는 것과 “비혼츌산을 응원”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사유리의 삶은 단지 그 자체로 축복해줄 뿐이며, 국가적/정책적으로 비혼출산을 권장 장려할 수 없는 영역이다. 비혼출산은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생명을 인간이 선택”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이전에는 육아와 아버지의 역할에 관해 의견을 남겼으나, 그 정도만 코멘트하고 넘기기엔 출산과 양육에 대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아 다시 의견을 기록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나는 페미니즘/pc주의에 대척되는 성이슈를 다루기도 하지만, 인헌고 사상주입, 광주 하명선거를 다루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올바른 교육을 고민하기도 한다. 페미니즘과 사상주입 두 가지 부문은 개연성이 충분하다. 둘 다 공교육현장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심각한 일이다. 한 마디로 나는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고민하다가 어쩌다보니 교육과 뗄래야 뗄 수가 없는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고민하게 된다. 애들한테 “비혼출산”에 대해 뭐라고 알려주는 것이 좋을까. “개인의 선택??” “개인의 자유??” 나는 도저히 이렇게 알려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출산을 인간의 선택과 권리의 영역으로 교육하는 것은 사실 “남성 비율을 10%로 축소시켜 종족번영에 하자가 없을 정도로만 제한해야한다” 는 sally miller gearheart의 주장을 비롯해 1970년대 부터 페미니즘 세력이 주장해온 것이다.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주장이었고, 또 이에 따른 파급력도 있었으나, 이것이 교육의 영역으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인구제한을 외쳤지만, 본질적으로는 인권을 위해서 “생명이 나고 죽음”에 대해 “인간이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아이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영역인가. 개인의 육체적 쾌락을 누릴 자유에 생명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방해적 요소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더 나아가서 “개인이 원하는” 생명을 개인의 선택으로 구매하여 만들 수 있는 것, “개인의 만족을 위해” 더 비싼 유전자를 개인이 선택하여 그 값을 지불할 수 있는 것, 한 아이가 이 세상에 나와 숨 쉴 수 있는 이유는 “개인의 자유와 만족을 위해 값비싼 유전자를 구매”했기 때문인 것, 개인이 원하지 않는 생명은 나의 선택으로 죽일 수 있는 것. 이런 것들이 소위 말하는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되어가는 세상이다. 이걸 요즘 깨시민 용어로는 “인권”이라고 한다. 



 어릴 적 엄마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엄마는 아빠랑 어떻게 결혼했어요?” “어디서 만난거에요?” “고백은 누가 했어요?” 내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가 궁금해진 것이다. 도대체 나라는 존재는 왜 어떤 이유로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 엄마와 아빠는 어떻게 만난걸까. 그 시절엔 어떻게 데이트를 했을까. 엄마아빠의 대학생 시절 데이트 이야기나 고백과 청혼 그리고 나 까지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들을때마다 새롭고 괜히 내가 다 뿌듯한 심정이다. 아, 내가 이런 존재구나. 이렇게 태어났구나.. 괜히 자존감 상승하는 느낌이랄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축복이었다. 어떤 개인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었다.

 


 이런 의견이 있었다. “나는 엄마아빠의 사랑과 행복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원하지 않던 존재였다.” “나의 존재는 부모의 후회다.” “존재 자체가 부모에게 짐이자 부담이다.” 맞다. 사실 생명이라는 것은 인간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전적으로 부모의 사유가 아니라는 말이다. 생명은 그냥 그 자체로 축복의 대상이다. 한 인간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명을 구매하여 만들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그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 난 생명은 부모의 사유가 아니었기에 그냥 그 자체로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비혼출산을 인간의 자유나 권리의 영역으로 보는 것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권리화다. 내 만족을 위해, 내 선택으로, 비용을 지불하여, 원하는 생명이 태어나도록 컨트롤 하고자 제도화하는 것은 인류가 진보하는 것/근대화 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 자유의 영역도 아니다. 유전자 자유시장경제는 “한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 그 자체를 사고 파는 것이다. 인간 근대화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 전지전능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명을 구매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것은 진보적, 근대적 제도인가? 

 


 애를 키우다보면 속상할 때도 있고 답답할 때도 있고 내가 이럴라고 애를 낳았나 싶을만큼 지지리도 말을 안듣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에휴 그 때 내가 구매하지만 않았어도, 저 자식은 없었던건데..” 생각하는 것이 진보적 근대적 인간의 삶인가. “내가 900만원 주고 산 놈이 이렇게 키울라고 산 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 진보의 문명인가. “엄마, 엄마는 어떤 존재를 원해서 900만원을 주고 날 산거야?” 라고 자신 존재의 이유를 물어보도록 하는 것이 근대화된 인류의 삶인가. 인간의 자유는 애완견까지다. 애완견 마저도 유기하지 말자고 하는 인권무새/자유무새들이 이제는 사람마저 인간이 애완하려한다. 또 물건은 사도 영수증만 있으면 환불이 가능한데, 생명은 환불도 안된다. 아 그래서 인간의 만족을 위해 낙태까지? ㅇ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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